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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21세기 지식인의 길, 육두피아
정영훈 | 팬덤북스 | 2011-03-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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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21세기 지식인의 길, 육두피아
정영훈 | 팬덤북스 | 2011-03-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역사 속 육두품들이 21세기 대한민국 지식인들에게
길을 묻는다!! 유시민 참여정책연구원 원장과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가 대한민국 386세대와 그 자녀들에게 추천하는 책! “대한민국에서 지식인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사와 시대, 그리고 정통성과 정의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대한민국은 아직도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세상인가?” “우리는 왜 행복해야 하는가?” 육두품이란? 육두품(六頭品)은 신라시대의 신분제인 골품제(骨品制)의 등급을 의미한다. 골품제는 성골(聖骨)·진골(眞骨)의 골족(骨族)과 6∼1두품의 두품층(頭品層)으로 구성되었는데, 육두품은 두품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이었다. 신라시대의 17관등 가운데 육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阿飡)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지만, 진골신분과 함께 신라 중앙귀족의 한 축을 이루었다. 설총, 강수 같은 학자들과, 원광, 원효 같은 고승들도 육두품이었다. 신라시대 후반기에 진골귀족들 간의 왕위쟁탈전이 치열해지고 중앙과 지방의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지자, 육두품들은 신라 골품제의 모순점을 비판하고 반(反)신라적 입장을 취하거나, 세속을 피해 은둔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되면서 고려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골품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수준 높은 관료문화를 형성하는 주역이 되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육두품인 지식인들에게 고함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회장과 총학생회장 권한대행을 수행, 전국대학생협의회의 정책위원회 활동으로 정치수배자가 되어 숨어 살았던 저자는, 사법고시를 합격한 후 법률사무소를 운영했으며 중국에서 핸드폰 무역회사를 경영했던 적이다. 현재까지 그는 현대아산 관광경협본부에서 변호사로 밥벌이를 하면서 순탄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 “나는 과연 이 시대의 진정한 육두품인가?” 라고 되묻게 되면서, 피 끓던 청년시절에 빠졌던 고민에 다시 몰입하게 된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육두품은 누구이며, 그 육두품들은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저자는 육두품은 지식인이며 지식인은 ‘먹물’이라고 주장한다. 먹물은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자들이다. 떡 하나가 더 주는 배부름보다 시대와 역사의 소명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자들이다. 바쁜 일상에 쫓기며 살지만 필요하다면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묵혀두었던 개혁 의지를 다시 꺼내들 수 있는 자들이다. 아니, 꺼내들어야 하는 자들이다. 우리의 남은 인생과 자식들을 위해서 말이다. 이 책은 대한민국에 사는 상식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고민했음직한 문제들을 풀어 놓고 있다. 저자는 이런 문제들을 풀어내기 위해서, 역사에서 육두품이라고 할 만한 여러 인물들을 -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정몽주, 정도전, 정약용, 이익, 신채호, 박은식, 김구, 조만식, 조봉암, 그리고 사마천, 토머스 모어까지 - 출연시켜 자신들의 시대와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을 대비하며 대한민국 혁신의 길을 간접적으로 조언하는 가상대담방식을 택하고 있다. 한 편의 방송대담 프로그램을 보듯 편안하며 가볍게 읽힌다. 하지만 원고가 읽기 편하고 가벼워도 그 무게는 가볍지 않다. 주고받는 대담 속에 더 공정하고, 더 정의롭고, 더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소망이 행간 행간에 넘쳐난다. 이러한 대한민국을 향한 혁신의 길이 바로 대한민국 지식인은 물론, 민초들이 바라는 소망이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대한민국의 육두품(지식인)이 꿈꾸는 육두피아(유토피아)다. 역사 속 육두품들에게 21세기 대한민국의 길을 묻다! - 신라 육두품의 대표 주자 3최를 만나다 신라의 3최를 통해 육두품은 누구인지를 물어본다. 신라 육두품은 어떻게 살았는지, 육두품의 본질은 보수적인지 아니면 진보적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글로벌 지식인이 되기 위한 해외유학 문제를 살펴본다. 또한 대한민국의 상위 5%, 서울 육두품의 기준을 찾아본다. 사회적 지위, 경제적 능력 외에 무엇을 서울 육두품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지를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조선의 3정이 말하는 21세기 육두품 조선의 3정을 만나 21세기 지식인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시대인식의 문제를 논의해 본다. 우리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치는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관계, 즉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충돌문제를 살펴본다. 또한 인문과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철학의 근본문제를 검토해 본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이후 형성되어 온 정치경제체제, 즉 권력분립과 대의제를 근간으로 하는 정치체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21세기에는 어떤 변신이 가능할지 생각해 본다. - 육두품과 正, 正 한 사회가 가지는 여러 가지 가치 중, 정통성과 정의의 문제를 살펴본다. 먼저 삼한정통론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우리나라의 이름은 어디에서 왔는지를 고찰해 본다. 또한 역사적 정통성과 시장경제의 상관성을 검토한다.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박정희 개발독재와 정통성의 문제도 다루어본다. 그리고 배분적 정의와 공리주의를 중심으로 정의의 문제를 검토한다. -육두피아를 찾아서 토머스 모어의 이상향이었던 유토피아에서 힌트를 얻어 21세기의 육두품, 지식인의 이상향으로 육두피아를 설정해 본다. 육두피아는 어떤 사회이고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지를 공상해 본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육두품처럼 살 수 있는 세상, 육두피아의 건설이 언제쯤 가능할까를 생각하며 우리의 잃어버린 정치적 상상력을 되살려 보고자 한다. -육두품이 가야 할 길, 통일의 길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한반도는 분단되어 있다. 분단의 극복 없이는 대한민국의 선진화도, 한반도 거주민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 통일은 필요한 것인지, 선진화와 통일은 어떤 관계인지, 국가보안법과 교류협력법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북한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한반도 경제 공동체 건설문제를 검토해 본다. -육도사와의 대담 : 육두품의 행복은 어디에 인생은 결국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육두품 도사를 만나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물어본다. 그리고 외람되지만 얼마 안 되는 필자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소중히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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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둘째 언니는 신데렐라를 꿈꾸지 않는다
김현미 | 북스컴 | 2009-05-2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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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둘째 언니는 신데렐라를 꿈꾸지 않는다
김현미 | 북스컴 | 2009-05-2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김현미는 둘째언니다!
둘째 딸이라는 것은 나의 생물학적인 위치이지만, 나의 사회적 위치도 둘째와 관계가 깊다. 물론 여기서 ‘둘째’라는 것은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어느 분야의 첫 번째 개척자에 이어 새로운 영역을 함께 다진 후진을 의미한다. 특히 여성의 새로운 영역 도전사에서 언제나 첫째는 홍일점으로서 세상의 주목을 받지만, 그 뒤를 잇는 여성의 경우엔 상대적으로 주목과 관심을 덜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더 실력과 전문성이 요구되는 것이 둘째의 자리이다. ‘둘째언니’ 리더십이란 바로 이런 사회적 둘째들을 위한 성공 마인드라고 할 수 있다. ‘둘째’라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둘째언니는 ‘최초’가 아닌 여성들을 뜻한다. 여성 리더 1세대라 불리는 맏언니들에 이어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꿋꿋하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온 2세대 여성 리더가 바로 둘째언니다. 둘째언니는 싸워서 이길 줄 아는 사람을 뜻한다. 둘째는 첫째보다 관심도 대접도 덜 받기 때문에 자기 자리를 만들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때론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덕분에 그들은 이기는 방법을 알게 된다. 둘째언니는 싸워서 이길 줄 아는 언니, 할 말은 하는 언니, 자신이 원하는 것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화끈한 언니, 실력과 전문성으로 승부하는 멋진 언니다. 둘째언니는 약자를 감쌀 줄 아는 따뜻한 리더를 뜻한다. 밖에서 맞고 들어왔을 때 대신 나서서 싸워주는 언니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둘째언니는 힘들 때 의지가 되는 언니, 어려운 일도 나서서 척척 해결해주는 언니, 언제나 내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친구 같은 언니다. 지금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데렐라의 꿈이 아닌 둘째언니 마인드다! 맏언니가 희생과 금욕의 이미지라면, 둘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싸워서라도 반드시 쟁취하는 당찬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원하는 것을 너무나 쉽게 손에 넣는 응석받이 막내 동생과는 또 다르다. 맏언니는 어쩐지 어렵지만, 둘째언니는 친근하다. 하지만 때론 철모르는 동생에게 따끔하게 충고하는 군기반장 역할도 하는 것이 둘째언니다. 맏언니와 동생 사이를 이어주는 든든한 징검다리, 지금 세상 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둘째언니’ 리더십이다. 여성들이여, 자기분야에서 ‘둘째언니’ 마인드로 성공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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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웃집 김형탁
서미현 | 레디앙 | 2011-03-28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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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웃집 김형탁
서미현 | 레디앙 | 2011-03-28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동네’ 사람이 된 노동운동가 이야기
‘이웃’이 쓰고, 친구들이 말하는 김형탁 《이웃집 김형탁》. 제목 그대로 진보신당 과천시 위원장 김형탁을 이웃 서미현이 인터뷰해 엮은 책이다. 인터뷰는 2008년 12월부터 총 10회에 걸쳐 60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한두 번 만나 묻고 답하는 식이 아니라 오랜 시간 함께 보내면서 느낀 점을 바탕으로 인터뷰이의 진면목을 담아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여느 인터뷰책과 다르다. 인터뷰 내용을 문답이 아닌 대필 형식으로 한 것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그만큼 긴밀함을 드러낸다. 그런데 서미현은 그 많은 이웃 중에서 왜 하필 김형탁을 주목한 것일까. 그것은 문화비평가 진중권의 추천글로 짐작할 수 있다. 우연히 학창 시절의 친구들을 볼 때가 있다. 어떤 친구는 20년 전 우리의 약속을 잊어버렸고, 어떤 친구는 그 약속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고, 어떤 친구는 그 약속을 잊지 않았으되 삶에 지쳐 지키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아주 가끔 20년 전 우리가 했던 그 약속 그대로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난다. 김형탁은 내게 그런 친구다. 그를 보는 것은 내가 부분적으로 잊었고, 부분적으로는 배반한 젊은 날의 가치를 살아 있는 형태로 보는 체험이다. 김형탁은 내게 그리고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그때, 그 자리 그 사람일 것이다. 늘 그렇고 그런 사람? 1962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형탁은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 10년간 학생운동과 조직활동을 했다. 1990년대 초 잠시 운동을 접고 생계를 위해 흥국생명 보험회사원이 되었는데, 그것이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입사 2년차에 흥국생명 노조위원장이 된 데 이어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 사무처장, 최연소 연맹위원장, 민주노총 부위원장, 민노당 부대표 등을 거쳐 진보신당 경기도당 위원장을 지냈다. 노동운동과 지역운동의 결합에 관심이 많으며, 현재 11년째 과천에 살고 있다. 이런 김형탁을 친구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할까. 대학 후배 우한기, 대구에서 함께 운동했던 하영식, 흥국생명 시절의 김정순, 진보신당에서 함께 활동하는 활동가 ‘이상한 모자’의 회상에서 김형탁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담담히 풀어낸 10년 ‘과천’살이 이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 ‘살아온 이야기’는 서미현이 김형탁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김형탁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잔잔히 들려준다. 가난해서 팔이 부러진 것을 부모님께 말하지 않아 불구가 된 초등학교 때 일화, 도통 들은 이야기를 남한테 옮기지 않아 ‘부처’란 별명을 얻은 고등학교 시절을 비롯해 짱돌 콤플렉스 때문에 끝난 대학 시절 첫사랑, 평생 든든한 후원자인 부인 박영미를 만난 얘기 등이 한 편의 소설처럼 흥미롭게 전개된다. 2부는 김형탁이 직접 쓴 글로, 11년째인 ‘과천살이’를 담담히 풀어놓는다. ‘중앙 활동가’에서 ‘동네 사람’이 되기까지 과정이 잘 나타나 있으며, 그렇게 되는 데 큰 도움을 준 문영배 씨를 소개한 글이 별도로 구성돼 있다. 김형탁이 ‘이웃’ 문영배를 다시 얘기한 것이다. 김형탁 연대기 1962: 대구 서구 비산동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63년에 태어났으나 동사무소 직원의 착오로 호적 나이가 한 살 늘어났다. 1970: 대구 서부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경일중학교(1976), 영신고등학교(1979)를 다녔다. 국민학교 6학년 때 놀다가 팔이 부러졌는데 부모님 보기가 미안해 병원에 안 가고 버티다가 팔이 영구히 굽었다. 이 일로 ‘곰’이란 별명을 얻었다. 1982: 서울대학교 사회대 1계열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고시책을 한 달 보다 던져버리고 학생운동 서클인 농촌경제학회에 들어갔다. 1983: 신림 6동에 얻은 자취방이 서클 아지트가 되었다. 시위 중에 어디선가 날아온 돌을 맞고 짱돌 콤플렉스가 생겼다. 1984: 2년 후배 우한기를 자취방에 재우고 해장국을 끓여주며 인연을 맺었다. 서클에서 첫 연애를 했다. 지금도 김형탁은 연애가 깨진 것이 자신의 짱돌 콤플렉스 탓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85: 5월 미문화원 점거 사건으로 전학련 간부들에게 수배령이 떨어졌다. 대구로 도망쳐 내려와 여러 동네를 전전하며 수년간 지하조직 활동을 했다. 1986: 굽은 팔 때문에 방위 판정을 받아 18개월간 복무했다. 1987: 까까머리 방위 신분으로 소개팅에 나갔다가 대학생 박영미를 만나 사귀게 되었다. 몇 차례의 감동적인 경험을 거쳐 서로 운동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한 듯하다. 제대한 뒤 조직활동을 계속하던 중에 하영식을 만났다. 1988: 조직 활동자금 마련을 위해 기획사를 차렸으나 재미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1989: 소련의 개혁, 개방 바람이 한국에 전해졌으나 김형탁은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거기는 거기고.’ 조직의 지시를 받아 대구를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박영미는 학원 강사를 하면서 구로 노동자종합학교에도 나갔다. 1990: 조직을 접고 취직을 결심했다. 박영미가 자신을 먹여살린 공로를 스스로 인정하고 고척도서관에 다니며 언론사 시험공부를 했다. 1991: 10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흥국생명에 입사하고 잽싸게 박영미와 결혼식도 올렸다. 김형탁을 데려가려고 부서 간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했다고 하는데 결국은 노조에 발탁되어 20년 가까운 노동운동의 길에 뛰어들었다. 1992: 아들 건규가 태어났다. 둥글둥글한 아빠와 갸름한 엄마 중에 엄마를 많이 닮았다. 1993: 입사 2년차 새파란 나이에 등을 떠밀려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노조 활동을 한다고 외박이 잦은 김형탁 때문에 박영미는 속을 많이 앓았다. 조합원들이 주로 젊은 여성들이라 노조 분위기는 매우 밝았다. 박영미가 <주간 노동자신문>에 기자로 입사해서 2년간 일했다. 1994: 유구영 실장을 만나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민주노조 운동의 흐름 속에서 제2금융권 단위사업장들의 통합 연맹을 조직하던 중 ‘짱구’ 채운석 위원장을 알게 되었다. 다음해 민주노총이 만들어졌고 통합된 사무금융연맹도 민주노총에 가입했다. 1996: 딸 효인이가 태어났다. 표정이 대단히 풍부하고 감성적인 아이다. 흥국생명 노조위원장에 다시 선출되어 두 번째 3년 임기를 시작했다. 총무 김정순도 이 시기에 간부로 활약했다. 1997: 국민승리21이 만들어지고 권영길이 출마했다. 김형탁은 열심히 뛰어다니며 선거운동을 했다. 김대중이 당선되고 구조조정의 먹구름이 노동운동을 뒤덮기 시작했다. 1998: 사무금융연맹 사무처장으로 임명되어 ‘7만 조합원’이 소속된 연맹의 살림살이를 맡았다. 과감하게 지르는 타입인 채운석 연맹위원장을 뒤치닥거리하느라 몹시 바빴다고 한다. 흥국생명에서 가혹한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1999: 연초에 과천 11단지 15평 아파트로 이사 왔다. 여름에 흥국노조가 구조조정에 대항해 힘겨운 파업에 들어갔다. 김형탁은 흥국노조 위원장 겸 사무금융연맹 사무처장으로 파업을 지휘했다. 마침내 교섭이 타결되어 타협안이 나왔으나 회사는 이후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흥국생명 해고자들의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2000: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자마자 가입하여 당원번호 41번을 받았다. 서른아홉 살에 최연소 연맹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한 연맹의 위원장은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의 웬만한 최고 간부보다 실세라고들 한다. 2002: 연맹위원장을 임기 전에 그만두고 민주노총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정치위원장을 겸임했다. 중앙노동위원회 노동자위원,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 등의 외부 일도 했다. 2003: 민주노동당 부대표가 되어 당 노동위원회를 맡았다. 민주노총 부위원장과 정치위원장까지 겸하여 한꺼번에 네 개의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아 그거 되게 부담스러워요.’ 거기다 민주노총 국제 업무까지 도맡아 전쟁반대 노동자대표단으로 이라크 국경까지 갔다 왔다. 동네에서는 아파트 동대표를 1년 동안 맡았다. 2004: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었다. 김형탁은 57명의 노동자 후보를 조직하고 자신도 과천·의왕 지역구 후보로 뛰었다. 노동운동계에서 단병호, 심상정이 비례대표로 나가는 데 김형탁이 애를 많이 썼다고들 하는데 본인은 별다른 말이 없다. ‘그 과정에서 내가 역할을 했다면 한 거겠지.’ 5월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선거에서 탈락했다. 총선 출마를 빌미로 흥국생명에서 해고당했다. 이때부터 5년간의 복직 소송이 시작되었고 가정 형편이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파트 동대표를 박영미가 맡아 1년간 했다. 2005: 생업으로 보험 대리점을 시작했다. 줄곧 반대해 오던 11단지 재건축이 시작되어 멀쩡하게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재건축 분담금 빚을 갚을 형편이 못 돼 현재도 완공된 11단지에 입주하지 못하고 세를 준 상태로 과천 단독주택가 전셋집을 전전하고 있다. 2006: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동당과 풀뿌리 그룹들이 뜻을 모았다. 민주노동당 황순식, 무소속 서형원이 과천 시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어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마지막 석 달을 옆에서 지켰다. 2007: 민주노동당 대변인을 맡아 심각한 당 상황을 가까이에서 직접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연말 대선에서 권영길은 71만여 표를 얻었다. 2002년에는 96만 가까이 득표한 바 있다. 2008: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다. 3월 진보신당이 창당되고 김형탁은 4월 총선에 출마해 9.7퍼센트(과천 13.8퍼센트)를 득표했다. 진보신당 경기도당 위원장을 1년간 맡았고 이때 20대 활동가 ‘이상한 모자’가 사무국장으로 함께 일했다. 2009: 동네에서 다시 일을 하려고 지역연구소 마실을 만들었는데 때마침 회사와의 오랜 소송에서 이겨 6월에 복직되었다. 회사 일과 동네 활동을 겸하는 게 불가능해 6개월 뒤 사표를 쓰고 동네로 돌아왔다. ‘식구들한테 미안하지. 요새 밥은 내가 지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