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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상천외한 조선왕조실록
황영택 | 김앤정 | 2010-11-0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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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상천외한 조선왕조실록
황영택 | 김앤정 | 2010-11-0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우리가 배워온 역사 지식 사이에 있는 빈틈에서 질문을 제기하면서, 조선 왕조 실록을 근거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두 명이었다든가, 조선에도 변호사가 있었다든가 역사 교육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기상천외하고 흥미진진한 얘기들을 들려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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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상인의 시대
공창석 | 박영북스 | 2010-04-1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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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상인의 시대
공창석 | 박영북스 | 2010-04-1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한국은 6.25 전쟁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으나 ‘한강의 기적’을 낳으며 일류 무역국가로 성장하였다. 헐벗고 피폐했던 한국이 짧은 시간 만에 무역대국으로 성장한 비결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개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근면성, 높은 교육열, 정부의 산업화 정책 등을 꼽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수출을 늘리고 고도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국 상인들이 세계시장을 개척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이라는 것을 자랑하면서도 상인의 존재에는 인색하다. 상인이 이룬 빛나는 성과는 정치권력의 치장거리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선조들이 상인을 맨 아래로 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체제를 조상 대대로 고집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의 진실과 거리가 멀다. 우리 선조들은 고대부터 상인을 매우 중시하였다. 상인이 역사의 주역이었다. 다만 성리학을 신봉한 조선이 500여 년 동안 상업을 억압하고 상인을 천시하였고, 이것이 점차 고유의 전통인 양 굳어져 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지구촌을 누비는 한국 상인의 기백과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이 그저 먹고 살려고 발버둥친 결과일까? 그건 그렇지 않다. 그저 발버둥 친다고 해서 무역대국이 될 수는 없다. 정답은 바로 우리 역사 속에 우리도 몰랐던 자신감과 역량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상혼과 상인의 전통을 찾아내고 미래로 이어가려는 목적에서 쓴 책이다. 오늘날 무역대국의 비결은 먼저 한국 상인의 빼어난 상혼과 상인 정신에 있다고 강조해 두고 싶다. 그리고 한국 상인의 상혼에는 세계시장을 리드하고 현대 상업 문화를 열어갈 만한 역량과 끼가 있다고 확신한다. 멀리 고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국 상인의 패기와 용기, 바다를 넘나드는 멋진 끼, 거래의 슬기 등 상혼의 유전자와 상인정신의 역사적 유산은 내면에 잠재해 있을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요즘 텔레비전에서는 사극들이 많이 방영되고 있다. 그리고 간간이 역사 속 상인들이 사극에 출연한다. 하지만 대개 그 상인들의 역할은 제한되어 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의 중심에 서지 못한다. 그러나 실제 우리 역사는 달랐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대상인들은 무수히 많았으며, 그들의 비중과 위상은 우리의 생각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역사 한복판에서 역사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대상인의 시대 - 한국 상업의 위대한 전통을 찾아서』에서 바로 그러한 위대한 상인 전통을 발견하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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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왕 세종
이수광 | 샘터 | 2010-08-2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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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왕 세종
이수광 | 샘터 | 2010-08-2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마에스트로, 대왕 세종
이 책은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룩한 세종대왕의 어린 시절부터 승하하기까지의 일대기와 그를 둘러싼 세종대의 명성 높은 신료들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의 요람이 되게 하고, 이천과 장영실을 중용하여 과학발전을 이루고, 박연과 함께 음악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여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세종이 더욱 높이 평가되는 것은 이 모든 업적이 병마와 싸우면서 일구어낸 업적이라는 사실이다. 후대의 문사들이 장영실과 박연을 일컬어 세종의 이름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 하늘이 낸 인재들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세종은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든 마에스트로 같은 존재였다. 이 책은 이렇게 세종과 신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세종의 업적들을 되짚어 보며, 세종의 성격과 리더십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수광은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 등을 집필하며, 역사의 대중화에 앞장서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저자는 큰 지도자를 바라는 국민적 염원에 부응하기 위해 한국적 자존감을 공고히 할 리더, 그런 리더의 전형이 될 수 있는 인물을 찾아냈다. 그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의 강력한 리더십과 그의 흥미진진한 일대기를 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맛깔진 저자의 이야기 솜씨가 더해져 독자들에게 학문적 성과와 재미를 동시에 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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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삼국사기
김부식 | 두산동아 | 2010-05-14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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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삼국사기
김부식 | 두산동아 | 2010-05-14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한국 문학 및 사상 100선』시리즈의 제 1권 『삼국사기』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주요 대학과 서울시 교육청, 한국교육학술정보원 등 기관의 추천을 받은 도서로서, 수능 언어영역 및 논술 대비를 위한 필수 콘텐츠이다. 『삼국사기』는 오천 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소중한 기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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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삼국유사
일연 | 두산동아 | 2010-05-14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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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삼국유사
일연 | 두산동아 | 2010-05-14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한국 문학 및 사상 100선』시리즈의 제 2권 『삼국유사』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주요 대학과 서울시 교육청, 한국교육학술정보원 등 기관의 추천을 받은 도서로서, 수능 언어영역 및 논술 대비를 위한 필수 콘텐츠이다. 『삼국유사』는 역사와 설화로 들여다보는 우리의 뿌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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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식민지 조선과 일본, 일본인
이규수 | 다할미디어 | 2011-02-28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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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식민지 조선과 일본, 일본인
이규수 | 다할미디어 | 2011-02-28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보통 일본인에 의한 풀뿌리 식민지 지배와 수탈
우리가 흔히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수탈이 조선총독부, 조선헌병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본 정부나 군부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쉽게 생각한다. 이 책은 식민지 지배와 수탈이 평범한 일본인들에 의해 더욱 강화,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사례를 들어 밝혀 낸다. 식민지 지배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정한론’으로 대표되는 노골적인 침략 사상에 물든 정치가 집단과 군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한국에 건너온 일본인 지주들에 의해 더욱 견고해 졌다는 것이다. ‘재조 일본인 연구’에 몰두해온 저자 이규수 연구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는 식민 정책사 연구가 주로 ‘지배에 대한 저항’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정작 ‘지배 성격 자체’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부족했다며, ‘보통 일본인’에 의한 ‘풀뿌리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구조를 밝혀 내고자 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호남에 진출했던 상업 자본가 후지이 간타로, 위선적인 교육가 마스토미 야스자에몽, 우콘 곤자에몽 등 평범한 일본인들의 지배와 수탈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전남 나주군 궁삼면과 신안군 하의도에서 농민회를 결성해 조직적으로 펼쳐졌던 농민운동을 고찰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호남에 세운 식민 사회의 구조적 특징과 이들이 한국 농촌 사회 구조에 미친 영향이 밝혀진다. 비옥한 농업 지대인 호남 지역은 일본인 진출의 주요 대상이었다. 비옥한 농지 확보와 소작제 농장 경영을 통한 미곡 유출은 일본의 식량 및 인구 문제 해결에 적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대보다 자본가의 임무가 더 중요하다”는 기치하에 일본인 지주들을 끌어 들여 토지 침탈과 지주 경영 및 농민 이민 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먼저 저자는 한국 지배 완성을 위한 일본의 집단 농업 이민 정책을 다룬다. 일본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강제적인 기간지 이민 사업을 전개했고, 상업 자본가 후지이 간타로의 불이흥업주식회사를 통해서는 미간지 이민 사업을 장려했다. 그러나 이런 국가 차원의 농업 이민은 비옥한 국유지와 기간지를 강제 수용하는 과정에서 소작권을 빼앗긴 한국 농민의 격렬한 저항에 의해 결국 실패했다. 다음으로 오사카의 미곡상이었던 후지이 간타로의 호남 진출 과정을 좀더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후지이는 동료 상업 자본가들의 자금을 모아 한국에 농장과 수리조합을 설립하여 대규모 토지 매수와 수리조사사업을 펼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 토지 소유자들은 수원을 탈취당하고 토지 방매에 의한 소작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 토지가 일본인 지주에 집중됨으로써 한국의 농촌 사회는 점차 대지주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이어 사재를 털어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의 은인’으로까지 불리는 마스토미 야스자에몽의 실체를 밝혀 낸다. 그는 복음전도가로서 위장했을 뿐 한국의 지가가 일본 관서지방 지가의 1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군산에 토지 매수 출장소를 설치해 농장 경영을 실시한 일본인 식민지 지주에 불과하다. 교육 또한 철저히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 정책을 따랐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끝으로 일제강점기 가장 격렬한 농민운동이 펼쳐졌던 전남 나주군 궁삼면과 신안군 하의도의 일본인 지주의 토지 매수와 그에 맞선 한국 농민들의 토지회수운동 과정을 다룬다. 경선궁 측과 동양척식회사에 맞서 궁삼면 농민들이 농민회와 토지회수운동동맹을 결성해 법적 대응과 소작료납부거부운동을 펼친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궁방의 민유지 약탈과 도쿠다 양행 토지 매수에 맞서 하의도 농민들 역시 농민조합을 조직해 격렬한 토지회수운동을 펼쳤다. 그런데 하의도 농민운동에는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국내외 농민운동가의 연대를 통한 저항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저자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생활한 농민 주체와 토지와의 관계?실태를 파악해 내고, 토지 문제를 둘러싼 투쟁에서 보여 준 농민 주체의 내재적인 힘을 발견한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정책사 연구는 정치?경제는 물론 종교 ?문화의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연구가 식민지 정책자, 식민지 지배자들 자신에 대한 연구로까지 발전되길 바라며, 정책의 생산구조나 지배의 내면적 구조와 성격을 밝히는 ‘지배세력’ 그 자체에 대한 내재적인 분석 작업으로까지는 나아가길 희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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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야 놀자 1
KBS 역사야 놀자 제작팀 | 경향미디어 | 2010-05-2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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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야 놀자 1
KBS 역사야 놀자 제작팀 | 경향미디어 | 2010-05-2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지루하고 어려운 역사는 가라!
역사는 ‘사람 사는 이야기’라고들 하지만 아이들은 역사를 어렵고 따분한 것으로 여기고 멀리한다. 그것은 역사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제시해주느냐의 방법에서 나오는 차이이다. <역사야 놀자> 프로그램은 제목에서 표방하듯, 우리 아이들에게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역사를 ‘공부하기’보다는 ‘놀게 하기’ 위해서 제작하였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역사에 접근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지면으로 보는 『역사야 놀자』는 크게 다섯 분야로 나누어 조선시대를 아우른다. 조선을 대표하는 임금, 조선시대의 생활상, 조선시대에 꽃피웠던 과학기술, 조선을 지켰던 명장, 백성들에게 빛이 되어준 인물들, 이렇게 정치, 문화, 과학 분야 등으로 폭넓게 조선시대를 다루어 편중된 시각에서 벗어나게끔 구성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내용들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 최초로 여론조사를 시행한 세종대왕, 출산휴가가 명시되어 있던 법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여성 CEO 등 현재 우리의 시각에서 흥미 있게 여길 수 있는 주제들이 있으며, 역사의 새로운 시각으로 밝혀낸 광해군의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주제를 단편적으로 제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배경을 함께 제시해주어 역사의 큰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놓치지 않았다. 자, 그럼 다 함께 놀면서 배우는 조선시대로 여행을 시작해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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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이한우 | 21세기북스 | 2010-11-0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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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이한우 | 21세기북스 | 2010-11-0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사필은 권력이다!
권력을 가진 자의 손 끝에서 쓰여진 조선의 역사, 그 이면에 담긴 역사 속의 진실 혹은 거짓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으로, 조선 초 최고 실세였던 정도전이 이방원의 왕자의 난을 통해 제거되고 500년이 흐른다. 그 시간 동안 정도전은 단순히 태종 왕권 획득의 걸림돌로부터 반란을 일으켰던 대역 죄인들도 동급으로 언급되는 것조차 꺼려하는 반란과 역적의 상징, 간신의 대명사로 변해 버렸다. 지금은 군신공치의 이상을 실현하려 노력했던 현자로 기억되지만, <<조선왕조실록>> 등 조선 시대의 역사서 속에서는 사정없이 난도질당했던 정도전. 조선 건국을 반대하다 살해된 정몽주도 태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세조에 반대해 목숨을 버린 사육신 성삼문도 오래지 않아 복원되었다. 똑같이 군신공치를 실현하려 했던 우암 송시열 같은 이는 조선 후기 최고의 성자로 추앙받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정도전만이 조선 500년 역사 동안 몰락을 거듭했던 걸까? 서술자의 주관이 담긴 사실(史實)을 이야기하는 역사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준다. 뛰어난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던 조선인들은 역사를 장악하는 것이 권력 정당성을 위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선왕조실록??을 장악하려 투쟁했고, 다양한 개인 문집을 쏟아냈던 것이다. 때문에 왕권이 강할 때는 왕의 입장에서, 신권이 강할 때는 신하의 입장에서, 혹은 정권을 잡은 정당의 색에 따라 성군(聖君)과 혼군(昏君), 명신과 간신이 갈린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은 진실일까? 역사는 그들을 왜 그렇게 기록했고, 왜 오늘날의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기억할까?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을까???는 정사 ??조선왕조실록??과 야사 속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기록된 56가지 흥미로운 일화들을 정사와 야사의 비교, 분석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논한다. 붕당의 뿌리가 되었던 이이나 이황은 오랫동안 추앙받았지만 조선 최고의 명정승이었던 이준경은 조선 후기의 당파 논리에 의해 역사에서 사라져 버려야 했던 점,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정조가 개인적인 복수심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보복을 전개하여 자신의 왕좌를 스스로 위험에 몰아넣었던 사실, 권력자들이 정사를 장악하기 위해 했던 노력 등 지금껏 역사서에서 읽지 못했던 다양한 사실들을 재조명하며 조선 역사 전체를 복원해 나가는 저자의 솜씨는 놀라울 정도다. 정사와 야사는 전체로서 역사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두 개의 눈이다. 독자들은 이 두 가지 눈을 통해 새로운 조선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대를 반추한다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을까?>는 조선인들의 뛰어난 역사의식 속에서 태어난 조선의 정사와 문집들을 분석하며, 저널리스트 출신 저자 특유의 민감한 통찰력으로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현대와 맞물리는 지점들을 깊이 있게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500년 내내 강대국 명, 청의 파병 요청에 시달리던 조선 왕들이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해야 했던 모습은 현대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역사 속에서 실록이 전하는 강대국의 청병에 대한 최선책은 결국 세종이 말했던 그대로다. ‘최대한 버티되 불가피하면 성심껏 임하라!’ _ p. 99 이와 같이 저자는 조선 역사와 현재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는 많은 ‘꺼리’를 제공한다. ‘군주 국가’ 조선의 통치자 군주를 다룬 1장에서는 조선 왕 개개인의 통치 특성을 알아본다. 2장에서는 조선을 이끈 국왕들의 힘이 어디서 나오고 어떻게 그 힘을 행사했는지, 또 잘못 행사하여 어떤 비극을 만들어냈는지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최고 권력자의 파워 문제는 지금도 생생하게 적용될 수 있을 만큼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3장에서는 지존(至尊)인 국왕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아니 바로 그 때문에 다양한 삶의 제약을 받아야 했던 왕실 사람들이 현실 속에서 보일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행태들을 그린다.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권력욕이 억제될 때 과연 어떤 본능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지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4장에서는 조선 정치 형성에 기여한 인물들을 선별해 조선의 정치 세계를 맛볼 수 있도록 했으며, 5장에서는 국왕을 뒷받침했던 관(官)의 세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한다. 조선시대 관가를 엿보면 진정한 관리상은 언제 어느 때건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장은 말 그대로 조선 사람들 중에서 기인이나 특출난 인물들을 뽑아 보았다. 거기서 조선 사람들의 삶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7장은 말 그대로 조선을 반대한 사람들에 대해 다뤄, 조선 백성들이 나라를 혼란으로 빠뜨리려는 위정자에게 어떻게 항의를 표시했는지, 권력을 쥔 자들이 민심의 향방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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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임진왜란 산책
남천우 | 미다스북스 | 2011-03-18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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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임진왜란 산책
남천우 | 미다스북스 | 2011-03-18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이순신의 죽음과 거북선의 진실을 파헤치다!
명량해전의 날, 임하도 서쪽 바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왜 이순신은 배 위에서 ‘전사’를 택해야만 했는가? 명장 이순신과 거북선의 진실을 누가 왜곡시키는가? 우리 민족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순신! 특히 21세기에 들어오면서 TV와 영화, 책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이순신의 거둔 불후의 전투 승과와 그의 영웅적 성품이 더욱 널리 알려져서 한국인이라면 초등학생에서부터 누구나 명장 이순신의 인간적 예지와 참된 애국심을 높이 기리고 예찬한다. 이 책 <임진왜란 산책>은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둘러싼 역사적 기록에 중대한 한 가지 질문을 던지는 데서 출발한다. 과연 <이분李芬의 행록行錄>에 적힌 것처럼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배 위에서 전사했는가? 이 역사적 기록물은 과연 사실인가? 이에 대해 저자인 전서울대교수 남천우 선생은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라는 놀라운 주장을 펼치면서 <난중일기>를 비롯하여 이순신과 관련된 모든 역사적 기록물들에서 그 증거를 제시한다. 또 ‘명량해전’으로 알려진 이순신 최고의 해전의 장소 역시 명량이 아니라 ‘임하도’였으며 지금 현재 복원되고 있는 거북선 역시 잘못된 엉터리임을 밝히고 이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1971년 ‘역사학보’에 <거북선구조에 대한 재검토> 논문 발표를 시작으로 이순신에 관련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반평생을 고군분투하면서 살아온 저자의 주장이 학계 내지 행정기관에서 어느 정도로 수용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기록된 역사가 반드시 사실만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이점에서 이 책은 이미 굳어진 역사적 진실에 대해 가능한 모든 질문을 던지고 그 사실 관계를 추론하면서 새로운 통찰로 역사를 재수용하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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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1
이우상 | 다할미디어 | 2011-03-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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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1
이우상 | 다할미디어 | 2011-03-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의 500년 역사를 왕릉으로 풀어내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에서부터 의친왕의 의왕묘까지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이 책은 조선 왕릉으로 조선왕조 518년을 정리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부터 의친왕의 의왕묘까지 왕릉을 순례하며 조선왕조 27대 왕과 그 일가들의 삶을 그려낸다. 조선 왕가를 이루었으나 소리 없이 살아간 왕의 후손들과 내시궁녀의 삶 등 역사 속에 감추어진 이야기도 따라가 본다. 조선왕조 518년, 27대 역대 왕과 왕비, 추존 왕과 왕비가 있다. 이들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며, 현재 조선 왕릉은 42기가 있다. 왕의 사친과 왕세자, 그 비의 무덤은 13기가 있으며, 원(園)이라 부른다. 묘(墓)는 대군과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으로 64기가 있다. 통틀어 119기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왕릉 순례를 통해 ‘죽음과 역사’라는 두 가지 화두와 만난다. 사색과 성찰, 휴식과 운동이란 부가가치도 뒤따른다. 삶과 죽음으로 풀어본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통해 옛 왕조와 혼을 느끼고, 왕릉답사 가이드를 따라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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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2
이우상 | 다할미디어 | 2011-03-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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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2
이우상 | 다할미디어 | 2011-03-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의 500년 역사를 왕릉으로 풀어내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에서부터 의친왕의 의왕묘까지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이 책은 조선 왕릉으로 조선왕조 518년을 정리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부터 의친왕의 의왕묘까지 왕릉을 순례하며 조선왕조 27대 왕과 그 일가들의 삶을 그려낸다. 조선 왕가를 이루었으나 소리 없이 살아간 왕의 후손들과 내시궁녀의 삶 등 역사 속에 감추어진 이야기도 따라가 본다. 조선왕조 518년, 27대 역대 왕과 왕비, 추존 왕과 왕비가 있다. 이들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며, 현재 조선 왕릉은 42기가 있다. 왕의 사친과 왕세자, 그 비의 무덤은 13기가 있으며, 원(園)이라 부른다. 묘(墓)는 대군과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으로 64기가 있다. 통틀어 119기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왕릉 순례를 통해 ‘죽음과 역사’라는 두 가지 화두와 만난다. 사색과 성찰, 휴식과 운동이란 부가가치도 뒤따른다. 삶과 죽음으로 풀어본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통해 옛 왕조와 혼을 느끼고, 왕릉답사 가이드를 따라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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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허경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04-27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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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허경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04-27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시대의 中心에 中人이 있었다!
조선 후기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이 존재했던 시기였다. 중국의 고증학에 영향을 받은 실사구시 학풍(실학)과 천주교의 유입 및 중인 계급의 성장은, 300년 넘게 이어져온 유교적 사회 질서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정조대왕 집권기로 대표되는 이 시기를 유럽의 르네상스나 계몽주의와도 비교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가 문화적으로 많은 시도가 행해졌던 시기였을 뿐 아니라, 근대화로 가는 중요한 가교였기 때문이다. 특히 전문직에 종사한 중인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다. 당시 중인은 신분적으로 사대부 양반 계층에 훨씬 미치지 못하면서도, 평민이나 심지어 천민에게도 존중 받지 못한 경계인이었다. 그럼에도 중인 가운데는 문·사·철을 뛰어넘는 비범함으로 문예부흥과 근대화를 주도했던 인물이 여럿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의료(의원)·법률(율관)·금융(계사)·외교(역관)·천문과학(관상감)·언론(박문국) 등의 전문지식에서 미술(화원)·음악(악생·악공)·문학 등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촉망받는 모든 분야의 중심에 조선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중인이 있었다. 좁고 지저분한 거리를 배회하던 ‘반쪽 양반’ 실학자 이중환은 인문지리서 「택리지」의 서론인 ‘사민총론’에서 백성을 사(士)·농(農)·공(工)·상(商) 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옛날에는 사대부가 따로 없었고, 모두 백성(民)이었다. 백성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선비가 어질고 덕이 있으면 임금이 벼슬을 시켰고, 벼슬하지 못한 자는 농사를 짓거나 장인(匠人)이 되거나 장사꾼이 되었다. 즉, 이중환은 사·농·공·상을 신분으로 보지 않고 직업으로 보면서, “사대부라고 하여 농·공·상을 업신여기거나 농·공·상이 되었다고 사대부를 부러워한다면, 이는 모두 근본을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_385쪽 참조 그러나 이중환의 이러한 논지는 당시 신분 차별이 매우 심각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사·농·공·상으로 나눈 이중환의 분류 어디에도 중인이 속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결국 조선시대 신분 차별의 본질은 어정쩡한 경계인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중인의 사회적 정체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반쪽 양반’이라 불리는 서얼은 육조(六曹)와 삼사(三司) 등의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금지되었기에, 대부분 역관·의원·율관·산관·화원 등의 기술직 관원이나 하급 행정 관리인 경아전과 서리에 종사했다. 서얼 출신이 기술직 관원이나 하급 행정 관리가 되면 그 후손들도 대를 이어 하급 관리에 진출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서얼 출신의 관리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워 고관으로 승진하여 양반 신분을 얻기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하급 관리로라도 가계를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이들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신분층을 형성하게 되면서 중인 계급을 이루게 된 것이다. 중인은 왕의 주치의인 어의, 도화서 화원, 외국에 파견되는 사신을 통역하는 역관, 호조와 형조에 근무하는 서리와 율관 등 왕실 및 조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생활 터전도 궁궐 근처에 있어야 했다. 따라서 많은 중인들이 궁궐 뒤 인왕산 기슭 굽이진 골짜기나 청개천 일대의 좁은 골목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중인을 위항인(委巷人)이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 가운데 꼬불꼬불한(委) 작은 길가(巷)에 사는 사람(人)'이라는 뜻으로, 그들의 거처에 따른 것이다. _15쪽, 388쪽 참조 일과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계급의 질곡에 맞서다 중인은 비록 왕실과 사대부 양반을 보좌하거나 나라의 한직을 채우는 인물로 취급받았지만, 그들의 일과 예술에 대한 열정은 실로 대단했다. 중인은 특히 자신들이 살았던 인왕산을 배경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다양한 예술적 활동을 꽃피웠다. 수려한 경관으로 한양 최고의 명승지로 꼽히던 인왕산은 신분 차별과 격무에 지친 중인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중인은 인왕산 기슭에 그들만의 서재를 꾸미고 그곳에서 문학동인이자 문화공동체인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시를 지으며 한평생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시사 가운데 특히 돋보였던 모임은 서당 훈장 천수경과 출판편집인 장혼, 명필가 마성린을 주축으로 결성된 ‘송석원시사’였다. _25쪽 참조 당시 문인들이 송석원시사에 초청받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장안의 화제가 되자, 그 뒤로 직하시사, 벽오시사 등 많은 시사가 생겨나면서 조선 후기 서민문학을 주도해 나갔다. 시사에 속한 중인을 ‘위항시인’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들은 무기를 지니지 않고 흰 종이 위에 문장력을 겨룬다는 뜻인 ‘백전(白戰)’이라는 백일장을 열어 문학적 교류를 이어 갔다. 장혼이 송석원시사의 시선집 「옥계사」에 쓴 발문은 당시 중인의 끈끈한 문학적 연대를 가늠하게 한다. 장기나 바둑으로 (벗을)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 _23쪽 문학이 중인을 문화공동체로 결집시킨 과외 활동이었다면, 그림과 음악은 그들의 대표적인 직업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화원은 국내보다도 일본에서의 활약이 대단했는데, ‘달마도’로 유명한 신필(神筆) 김명국은 역관시인 홍세태와 함께 일본에 한류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당시 일본인은 조선의 문장가나 화원의 시와 그림에 광적으로 매료되었는데, 조선통신사 사절단으로 방문한 문장가와 화원은 가는 곳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국빈 대접을 받았다. _109쪽, 275쪽 참조 당시의 화원 가운데는 돈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붓끝을 곧추세웠던 최북 같은 인물도 있었다. 그는 그림을 강요하는 양반 고관에 맞서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가며 권력과 타협하지 않은 대쪽 같은 예술가였다. _132쪽 참조 중인의 전방위 재능과 비범함은 예술 분야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그들은 탁월한 외국어 실력과 열린 사고로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문화 메신저였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전염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을 구해낸 용기 있는 히포크라테스였으며, 과학적 사고로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온몸으로 실천한 신지식인이었다. 성리학의 탁상공론에 빠져 정쟁만을 일삼던 사대부도 실천적 지식으로 무장하여 사회적 영향력이 커져가는 중인 계층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의 메이저가 인정한 진정한 메이저 이처럼 당시 양반 사회에서는 중인 계층을 천하게 여기면서도 경계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중인의 전문적 식견과 재능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몇몇 왕과 사대부는 중인의 비범한 재능과 실천적 사고를 높게 여기며 측근에 두고 교류하기도 하였다. 조선 최고의 명필 추사 김정희는 중인과 교류가 깊었던 양반 선각자이다. 서얼 출신 검서관 박제가의 제자이기도 한 추사는, 송석원시사의 좌장 천수경의 부탁으로 1미터가 넘는 화폭에 예서체로 ‘松石園’ 석 자를 써 주기도 했다. 추사는 또한 역관 오경석, 이상적, 화원 조희룡을 제자로 삼으며 친하게 지냈는데, 1840년경 제주도 유배지에 찾아온 이상적에게 그의 최고 걸작 ‘세한도’를 그려주기도 했다. _25쪽, 316쪽 참조 연암 박지원 역시 중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양반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실제로 연암의 소설에는 중인이 자주 등장하는데, ‘허생전’에서 가난한 양반 허생에게 밑천을 대준 변씨는 중인 출신 갑부 변승업의 조부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연암은 요절한 천재 역관 이언적의 전기 ‘우상전’을 짓기도 했는데, 여기서 당시 일본에 파견하는 조선통신사에서 중인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하였다. _296쪽, 370쪽 참조 일본의 관백(關白)이 새로 정권을 잡으면, (먼저 조선통신사를 초청하기 위해) 저축을 늘이고 건물을 수리하고 선박을 손질했다. 또 속국의 여러 섬을 깎아 자기 소유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검객·서화(書畵)·문학 등 여러 분야의 재능인을 모아 훈련 시켰다. 그런 지 몇 년 뒤에야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마치 상국의 조명(詔命)을 기다리는 것같이 공손하였다. 그러면 우리 조정에서는 문신 가운데 3품 이하를 골라 삼사(三使)를 갖추어 보냈다. 이들을 수행하는 사람도 모두 말 잘하고 많이 아는 자들이었다. 천문·지리·산수·점술·의술·관상·무력에서부터 퉁소 잘 부는 사람, 술 잘 마시는 사람, 장기나 바둑을 잘 두는 사람,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기술로 나라 안에서 이름난 사람들을 뽑아 사절단에 포함 시켰다. 이처럼 중인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연암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그들의 탁월한 재능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중인의 재능에 대한 신뢰는 양반뿐 아니라 왕이나 왕족에게서도 엿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조이다. 정조는 당시 서얼금고법으로 인해 중인이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규장각에서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일을 하는 검서관직을 신설하여 서얼 출신 지식인을 등용하였다. 1779년에 임명된 초대 검서관이 바로 유득공·이덕무·박제가·서이수 네 사람이다. 당대에 가장 명망 있는 중인 출신인 이 네 명의 학자를 ‘4검서’라 불렀는데, 정조는 이들과 함께 신학문을 연구하면서 문예부흥의 초석을 쌓았다. _36쪽 참조 중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왕족 가운데는 뜻밖에도 흥선대원군이 있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권력층을 견제하기 위해 아전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면서 수많은 중인 서리를 사조직으로 흡수하는, 이른바 ‘아전정치’를 폈다. 대원군은 중인을 정치적 야욕에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만큼 중인 출신 관리들의 탁월한 행정 능력을 인정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중인 출신 서리 말고도 박효관, 안민영 등의 음악인과도 가깝게 지냈는데, 인왕산 필운대에 ‘운애산방’이라는 공간을 마련해주며 가객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박효관은 대원군의 지원에 힘입어 「가곡원류」를 편찬하여 후세에 국악을 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_34쪽, 165쪽 참조 이 밖에도 영조, 다산 정약용, 번암 채제공, 구암 허준, 겸재 정선 등 당대 최고의 인물 곁에는 항상 중인이 있었다. “인재는 인재를 알아본다.”는 말이 있듯이, 결국 시대를 이끈 주인공의 눈에는 또 다른 주인공이 들어왔던 것이다. 중인은 비록 신분의 벽에 막혀 세속적인 영예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시대를 이끈 메이저 사이에서는 중인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진정한 메이저였다. 부귀와 권력을 탐하지 않고 한평생 살맛나게 살면 ‘그만(而已)’인 삶 당시 중인 계층은 “신분에 제한 없이 실력에 따라 벼슬하게 해 달라.”며 조정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 방법이 폭력적이거나 과격하진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851년 조정에 올린 상소문을 작성한 율관 장지완이다. 상소문을 이용한 일련의 중인 통청 운동은 지금으로 치면 민변이나 시민단체들이 벌이는 인권운동과도 흡사했는데, 실제로 정조는 중인의 상소에 귀 기울여 규장각에 검서관직을 신설하기도 했다. _232쪽 참조 그러나 중인의 통청 운동은 유럽의 시민혁명 등과 같은 계급투쟁의 모습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계급의식이나 인권 개념이 낙후되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중인 계층의 성향이 투쟁적이거나 권력지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인 대부분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능력에 비한다면 턱없이 소박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물론 태어나면서 운명에 순응하며 살 수 밖에 없는 당시의 사회 제도적인 한계 탓도 있었지만, 그러한 사회적인 불만을 범죄 등의 일탈행위를 통해 터트리기 보다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과 예술 활동으로 승화한 것이다. 인왕산을 주무대로 활동했던 위항시인이자 출판편집인 장혼이 시에 즐겨 썼던 ‘그만(而已)’이라는 표현은 당시 그들의 삶이 얼마나 관조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홀로 머물 때에는 낡은 거문고를 어루만지다 누워서 옛 책을 읽으면 그만이고, 마음 내키면 밖에 나가서 산기슭을 거닐면 그만이다. 손님이 오면 술상을 차리고 시를 읊으면 그만이고, 흥이 도도해지면 휘파람 불며 노래를 부르면 그만이다.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으면 그만이고, 목이 마르면 내 우물의 물을 마시면 그만이다. 추위와 더위에 따라 내 옷을 입으면 그만이고, 해가 지면 내 집에서 쉬면 그만이다. 철저한 문헌 해석에 근거하여 풀어낸 최초의 ‘중인실록’ 최근 몇 년 동안 출판에서는 물론이고, 영화나 방송 등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인물에 대한 조명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왕조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민초들 속에 숨겨져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찾아내 그들의 비범한 능력과 드라마틱한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시도는 많은 사람에게 큰 호감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역사 속 민초들에 대한 기록들을 모아 한권의 역사 논픽션으로 묶어 출판하면, 이를 바탕으로 흥미진진한 팩션문학이 생성되고, 또 이를 시나리오로 재구성하여 스팩터클한 미니시리즈나 영화로 제작되는 일련의 과정은, 이제 중요한 역사 콘텐츠 메이킹 시스템으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심심찮게 발생되는 역사 왜곡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주인공으로 재배치된 인물의 삶은 사료의 부족으로 인한 고증의 오류, 흥미유발을 위한 상업적 코드에 매몰되어, 치정(痴情)화 되거나 변질되고 만다. 결국 역사에 대한 다양성의 욕구가 지나쳐 역사 본연의 진실이 왜곡되어 버리는 것이다.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면서 역사 콘텐츠의 지나친 상업적 코드화를 탈피한 역사 다큐멘터리를 지향한다. 이 책은 문헌의 철저한 해석에 근거하여 다양한 역사적 지층을 하나하나 고증해 역사 본연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풀어낸다. 문헌에 나와 있는 역사적 기록을 그대로 풀어내더라도 중인의 삶은 충분히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기 때문에 그 어떤 재배치나 인위적 창작을 가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고전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저자 허경진 교수는, 조선 후기 위항문학을 연구하면서 수집한 수많은 중인 관련 기록과 문헌을 바탕으로, 이 책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이라는 이른바 ‘중인실록’을 엮어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많은 기록을 부지런히 찾아내어 정확하게 해석하고 냉정하게 고증하는 것이 역사적 글쓰기의 본령임을 제시한 것이다. 독자들은 그 어떤 재배치나 왜곡 없는, 사실 그대로의 역사 콘텐츠를 지향한 이 책의 텍스트 만으로도 인문적 소양은 물론, 중인의 곡진(曲盡)한 삶에 배어있는 드라마틱한 재미와 감동까지 충분히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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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메멘토모리
정구선 | 애플북스 | 2011-01-20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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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메멘토모리
정구선 | 애플북스 | 2011-01-20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은 조선시대 자살 사건!”
왕실을 둘러싼 자살에서 민초들의 자살까지 조선시대 비극적인 죽음을 기억하라! - 조선이 숨긴 ‘자살’을 말하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얻을 만큼 대한민국의 자살률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최근 ‘행복 전도사’ 최윤희 씨의 자살을 포함해 전직 대통령의 자살,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기업인들의 자살, 정치인들의 자살 등 공인들의 자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사회 전반에 생명 경시 풍조 또한 팽배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자살은 어땠을까? 인조 대의 문신 ‘홍호’는 마음가짐에 따라 자살을 세 가지 등급으로 나뉘었다. 가장 높은 등급은 인仁을 이루고 의義를 취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 그다음 등급은 비분강개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는 것, 마지막 등급은 형세가 반드시 환난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는 것이 그것이다. 머리카락 한 올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신체관 때문에 자살을 죄악시하는 전통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자살은 비일비재했다. 왕족으로 태어나 왕으로 추대되었다 하여 자결을 강요받은 인성군 이공,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어 자결의 길을 택한 유성원, 기묘사화 후 남편이 사약을 받고 죽자 남편의 명예 회복을 위해 따라 죽은 김정의 부인 송씨,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아내지 못해 몸을 던진 신립 장군 등 자살은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되어왔다. 조선이 만든 비극적인 자살을 통해 조선을 다시 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삶, 돈, 사랑 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욕심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이유에서의 자살보다는 정치적인 이유, 체제 저항의 수단, 또는 절개를 지키기 위한 이유에서 죽음의 길을 택한 자살이 많았다. 대게 조선의 집권층인 양반 사대부들은 정치적으로 패배하거나 역모에 실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당쟁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끊기도 했다. 또 힘없는 백성들은 체제 저항의 수단으로 죽음을 택했으며, 여성들은 관리들의 착취에 저항하고 정절을 지키려고 세상을 등졌다. 저자는 ‘왕실을 둘러싼 자살, 정치적 패자들의 자살, 여인들의 자살, 전쟁터에서의 자살, 권력에 저항한 약자들의 자살’로 구성해 비극적인 조선시대 자살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왕실이나 정치적 패자들의 죽음보다 여성들의 죽음과 전쟁터에서의 죽음 그리고 민초들의 죽음을 재조명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신숙주의 부인 윤씨의 자살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지만 남편 신숙주가 성삼문 일행을 배반하고 살아남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또 군역으로 인한 고통으로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민초들의 죽음, 조선 초기에 중국에 바쳐야 했던 공녀들의 자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공녀로 차출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높았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시집을 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지 않으려 통곡하다 죽거나 구덩이에 몸을 던진 것이다. 한 시대를 이끈 왕실을 둘러싼 자살뿐 아니라 이처럼 민초들의 자살까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조선시대 자살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또 역사에서 배제되었던 혹은 잘 드러내지 않았던 비극적인 자살 사건을 통해 조선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일면을 알아보고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이면서 사회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살 뒤에 가려진 사회문제를 통해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고 아직도 의문으로 남은 조선시대 자살에 대해 낱낱이 파헤친다. 조선이 버린 자들의 죽음을 기억하다 _ 왕실을 둘러싼 자살 사건, 광해군의 세자 ‘이지’ 조선시대에는 왕족 및 권력의 암투에 희생당한 비극적인 죽음이 많았다. 광해군 15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왕으로 세운 정변인 인조반정으로 폐세자가 된 이지는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정치적 이유로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 폐세자로 떨어진 비운의 인물 중 유일하게 자결한 사람이다. 그로 인해 아내인 폐비 박씨 그리고 폐비 박씨의 아버지 박자흥, 박자흥의 아버지 박승종까지 자결하게 된다. _ 정치적 암투와 그 패자들의 죽음, 유영경 조선시대 당파 싸움은 굉장히 치열했다. 각 당파는 상대 파를 용서하지 않고 아예 뿌리를 뽑아버려야 직성이 풀릴 정도였다. 유영경은 당시 소북파의 영수였는데, 대북파와 세자 문제로 심한 마찰을 빚었고, 막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다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파에 의해 자결하라는 명을 받는다. 그러나 죽음으로도 당쟁이 끝나지 않을 만큼 조선 사회를 갉아먹은 주된 폐해인 당쟁으로 인한 자살 사건을 알려준다. _ 여인들의 한스러운 자결, 김정의 부인 송씨 남성들에게 사회, 정치적 명예가 중시되었듯 조선의 여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예는 정절이었다. 이를 지키지 못할 위기에 처하거나 몸을 더럽혔을 때 선택한 자살은 뭇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열녀문을 세워주는 등 나라에서 은전을 내리기까지 했는데 이 장에서는 정절을 지킨 여성뿐 아니라 의로운 죽음을 택한 여성들의 자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중심인물로, 폐출된 중종의 왕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했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고 기묘사화로 인해 유배되고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아 김정이 억울하게 죽자 남편의 명예 회복을 위해 남편을 따라 김정의 부인 송씨의 자살 등. 정난정, 장희빈, 화순옹주, 박문랑, 황해도의 열녀 126인의 자결에 대해 재조명하고 있다. _ 전쟁터에서의 의로운 결단, 신립, 신급 형제 전쟁터에서의 죽음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의로운 결단으로 자살한 경우는 흔치 않다.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적을 막아내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상황에서 몸을 던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무예 닦기를 좋아한 신립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 때 고니시를 선두로 한 왜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해 수적 열세로 포위되어 참패를 당하자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스스로 남한강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그의 형인 신급도 적병을 만나 쫓기다 절벽해서 투신했다. _ 민초들의 마지막 선택, 군역으로 인한 죽음 요즘 병역 기피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지만 요즘과는 달리 조선시대의 군역의 고통은 자신의 목숨과 일가족의 생계가 걸린 일이었다. 조선 중종 때에는 병사와 수사의 횡포 때문에 자살하는 수군들이 많았고, 또 군대에서 번을 서는 대신에 바치던 돈인 번가의 독촉도 매우 심했다. 그 고통과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처자를 이끌고 목을 매거나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권세가들이 글을 읽는 동안, 힘없는 백성들은 군역을 질 수밖에 없던 조선시대의 민초들의 고통을 알려주고 있다. _애도할 수만은 없는 죽음, 시역 사건과 간통 지금도 뉴스를 장식하는 끔찍한 사건들, 예를 들면 패륜아나 간통과 관련한 사건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계모와 재산 다툼을 벌이다 자살한 이가 있는가 하면 몽둥이로 제 어미를 때려죽인 후 자살한 이도 있었다. 또 사노가 주인집 처녀와 사통하여 자식을 낳고 자살한 사건 등, 슬퍼할 수만은 없는 자살 사건에 대해 살펴본다. 또 자신의 실수나 실패를 불명예로 여겨 할복자살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는 조선 땅에서 자살한 일본인들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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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
정구선 | 팬덤북스 | 2010-07-2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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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
정구선 | 팬덤북스 | 2010-07-2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조선시대 선비들의 유일한 출셋길 장원급제,
그 영광과 좌절의 드라마를 읽는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1등이 인생에서도 1등이었을까?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에도 커닝과 대리 시험이 존재했다? 조선시대의 장원급제는 출신성분과 집안의 재력으로 결정됐다? 세상만사 = 출세만세? “조선시대 고위 관료로 출세한 조상 분들의 묘를 보고 뿌듯해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 어머님은 항상 저한테 ‘자네’라는 호칭을 쓰셨습니다. 이를테면 학창시절의 제게 ‘자네, 우리 집안에 정승이 3대째 끊긴 것을 아는가!’라는 식의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출세가 한국인을 가장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키워드라고 생각합니다. 성공이라는 말에는 웃지만 출세에 대해서는 경계의 눈빛을 보이죠. 성공은 자기만족적이고 출세는 질투, 욕망, 선망 등 다양한 코드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앞의 글은 정운찬 총리가 서울대학교 총장 시절이었던 2004년,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며, 뒤의 글은 지난 1월에 방영된 SBS 스페셜 <출세만세>를 제작한 남규홍 PD의 말이다. 두 인터뷰에서 볼 수 있듯,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들 가운데 핵심 중의 핵심 키워드가 ‘출세’다. 출세는 개인에게 부와 명예를 주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혈통주의를 중시하는 사회적 특성 때문에 출세는 무엇보다 가문의 영광이다.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는 “출세! 이념보다 훨씬 강하고 진하고 질긴 한(恨)이다”라고 논했다. 우리는 애써 외면하든 피터지게 노력하든 사회적 인간으로서 출세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존재다. ‘세상만사 = 출세만세’라는 등식이 사회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출세욕을 가진 사람에 대해 이중적인 잣대를 댄다. 막연한 부드러움과 이유 없는 질시가 교차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두 성향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며, 현재의 한국을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출세는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도 출세는 선비의 길이었으며 꿈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출셋길은 무엇이었을까? 출세로 가는 지름길, 장원급제 조선시대에서 평범한 선비들이 출세하는 유일한 길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는 것이었다. 조선팔도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오직 그날만을 위해 몇십 년간 갈고닦은 실력을 겨루어 당당히 과거에 급제, 그것도 으뜸 중의 으뜸인 장원급제를 하는 것은 개인의 영예일 뿐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자 온 고을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장원급제의 영광 뒤에는 무수한 삶의 굴곡이 숨어 있었으니, 과거 시험이나 장원급제를 둘러싼 극과 극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노라면 자연히 오늘날의 과도한 입시 전쟁이나 사회의 온갖 경쟁을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은 500여 년간 조선 사회를 이끈 중심이었던 과거제도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천태만상의 부정행위와 제도적 한계로 끊임없이 임금과 관료들의 골머리를 썩인 과거제도의 명암을 두루 살펴본다. 또한 과거 시험이 낳은 조선 선비들의 다양한 인생 드라마와 굴곡 많은 삶을 살다 간 장원급제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시험에서 1등이 인생에서도 반드시 1등인지 질문을 던진다. 과거 시험의 이모저모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은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어 시행되었고 문과는 다시 대과와 소과로 나뉘었다. 소과는 대과를 위한 예비시험 성격이었는데, 생원진사시 또는 사마시라고도 불렸다. 조선 시대에는 대과를 보통 문과라고 했으므로 문과에 급제하는 것은 양반 관료사회에 당당히 진입하기 위한 중요한 관문을 통과했다는 의미였다. 학자들마다 통계에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 시대를 통틀어 문과 시험이 대략 744회 실시되어 급제자는 모두 만 4,620여 명이 나왔으며 장원급제자는 744명이었다. 문과 급제자 전체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숫자고, 1년에 장원급제자가 대략 1.4명 배출되었으니 정말 어려운 과정을 통과한 셈이다. 문과 급제는 개인의 영광뿐 아니라 가문의 커다란 영예였다. 급제만 해도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는데 더구나 장원급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조선 시대는 양반의 시대고, 양반 가운데도 소수의 문벌 가문이 지배한 사회였다. 그리고 권력의 중심에 접근하려면 무엇보다 문과에 급제해야 했다. 또한 대를 이어 문벌을 유지하려면 문과 급제가 필수였고, 이왕이면 장원급제를 기대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서울에 사는 문벌가의 자제들이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는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장원을 차지하려면 무엇보다 든든한 집안 배경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는데, 그러한 배경이 없는 시골의 가난한 선비들은 오로지 공부에 의지해야 했다. 게다가 그들은 어려운 현실을 벗어나 입신양명하려면 열심히 공부해서 급제하거나 장원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원이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이는 엄중한 금기를 깨고 불공을 드리기도 하고, 과거 시험만 보게 해준다면 개구멍이라도 지나겠다고 통사정을 하는가 하면, 신문고를 두드리는 이까지 있었다. 그리고 장원급제자들 가운데는 어렵다는 과거에 연달아 장원을 차지한 수재도 있었고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이들도 있었다. 부자지간 또는 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모두 장원을 차지한 집안도 나왔다. 장원 중에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장원을 차지한 인생 역전의 승부사들도 있었다. 서얼은 과거를 볼 수 없었지만 신분 제한을 뛰어넘어 장원급제까지 한 사람도 있었고, 여러 차례 낙방을 거듭하다가 장원을 하거나, 문과에 급제했다가 취소된 후 다시 시험을 보아 장원급제의 영광을 거머쥔 이들도 나왔다. 그 밖에 귀양살이를 한 뒤 분발하여 장원을 차지한 이도 있었다. 시험 1등이 인생에서도 1등은 아니다 장원급제자들은 으레 모두 순탄한 과정을 거쳐 출세하고 영달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들 가운데는 끈질긴 비판에 직면하거나 억울하게 정치적인 희생양이 된 이들도 있었으며 순탄치 못한 관직 생활을 이어간 이들도 있었다. 물론 국왕의 총애를 받거나 공신이 되고 정승, 판서까지 올라 영화를 누린 이들도 있었고 청렴강직한 자세로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은 장원도 있었지만 말이다. 과거에서 장원급제했다고 인생에서도 반드시 장원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요즘 말로 과거 시험의 달인이 곧 인생의 달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성경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장원이라고 자만에 빠져 나태하거나 불성실하게 생활하는 자들은 성실하고 끈기 있게 살아가는 비장원급제자들에게 추월당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의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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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국을 말한다 2 - 시경 속의 세계
양산췬, 정자룽 | 신원문화사 | 2010-11-1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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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국을 말한다 2 - 시경 속의 세계
양산췬, 정자룽 | 신원문화사 | 2010-11-1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일반 독자들을 위한 중국 역사 문화를 집대성한 백과사전!
중국의 저명한 사학자 및 시대별 전공 학자들과 전문 편집인이 일반 독자들을 위해 수년간 심혈을 기울여 작업한 중국 역사 개론서 《화설중국話說中國》이 《중국을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먼저 1~3권이 신원문화사에서 발행되었다. 《중국을 말한다》는 총 1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국의 원시 사회부터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가 멸망하기까지의 역사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본서는 유구한 중국 역사의 흥망성쇠를 시대별로 나누고, 그 시대의 주요 역사적 사건 및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1500여 편의 표제어로 엮어 구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 형식으로 서술하여 ‘구수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보는 중국사’가 되게 만들었다. 또한 세계적인 안목을 가진 저명한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우선적으로 반영했으며, 나아가 ‘역사문화백과’ 및 연표 등을 통해 중국 역사의 발전 맥락과 세계사의 풍부한 정보를 함께 제공하여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하기 쉬운 깊이 있는 내용을 보완했다. 즉 이야기가 가진 감성적인 감동과 역사 지식에 대한 이성적인 요구를 통일시킨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한 그루의 나무뿐만 아니라 거대한 숲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각각의 이야기가 주는 재미와 함께 역사적인 큰 지혜도 얻게 될 것이다. 3000여 점의 풍부한 그림 및 사진 자료로 5천 년 사회 문명의 성과를 입체적으로 표현! 이 책에는 3000여 점의 풍부하고도 세밀한 그림 및 지도, 사진 자료를 실었는데 이러한 사진과 그림들은 감상을 위주로 하는 사진이나 기존의 그림과는 크게 다르며, 독자들로 하여금 당시의 생활상을 보는 듯한 생생한 역사적 사실감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사진과 그림들은 그 영역 또한 대단히 넓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현장을 깊이 있게 재현하고 발전 과정과 변화를 입체적으로 돌출시킴으로써 본문의 내용을 생생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따라서 이 책 속의 그림과 사진들은 중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전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러한 사진과 그림들을 문화적인 유형으로 분류한다면, 사진으로 보는 복식문화사, 의약사, 도서 서적사, 풍속사, 군사사, 과학 기술사 등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분야의 역사 사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책은 사진, 그림과 글을 유기적으로 조화롭게 결합시켜 중국 역사와 문화의 정수를 재현시킨, 오늘날 독자들의 취향에 맞는 알기 쉽고 재미있는 중국 역사 개론서이다. 백과사전식의 편집 구성 《중국을 말한다》는 단순히 중국의 역사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중국 역사 발전의 시대 순에 따라 백과사전식으로 편집되었다. 각 시대마다 이야기의 주제를 표제어로 하여 2페이지 내외의 독립 면으로 구성하였기 때문에 독자들의 관심 또는 필요에 따라 사전처럼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시대적 상황과 연결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관한 ‘역사문화백과’ 및 풍부한 그림, 사진 자료와 함께 소개하여 당시의 생활상을 좀 더 생생하게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권말에 생활 및 역사문화백과 색인을 실어 관심 있는 분야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중국 역사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길라잡이!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역사는 사람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했다. 역사적 경험에는 깊은 사색을 필요로 하는 이치들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미래를 현명하게 내다보려면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현실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중국을 말한다》는 중국인들이 그들의 역사를 보는 시각이다. 때문에 분명 우리와 그 맥락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다. 비록 내용 중 우리 역사와 충돌하는 부분이 있지만 중국과의 교류가 날로 증가하고 있고, 또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주변국들이 주장하는 그들의 역사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때문에 중국인의 세계관이 잘 드러나면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본 책을 소개하는 것이다. 이 책은 청소년들과 일반 독자들에게 중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여 줌과 동시에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도 비교 분석을 통해 실증적인 연구를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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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콘서트
백유선 | 두리미디어 | 2010-01-2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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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 콘서트
백유선 | 두리미디어 | 2010-01-2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결정적 장면 29가지
그 변혁의 드라마를 만난다! “역사를 아는 자는 무너지는 담장 아래 결코 서지 않는다.” 제왕학의 교과서로 불리는 중국 당나라 사서 《정관정요》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역사를 아는 것, 더 나아가 역사가 본연의 진실에 충실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 책은 ‘흥미’에만 초점을 맞춰 종종 역사 왜곡을 낳는 대중 역사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 본연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선사 시대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긴박하고 파란만장했던 29장면을 선별해 한국사 전반을 깊이 있고 명쾌하게 풀어썼다. 기록 아래 숨겨진 ‘진짜 역사’를 견인하다 교양인이라면 바로 알아야 할 한국사의 참모습! “단군은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했다.” “삼족오는 고구려의 상징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은 주몽이다.” “진성여왕은 남자관계가 복잡했다” “고려는 일부다처제 사회였다.” “나선 정벌은 조선이 러시아를 정벌한 사건이다.” “황희는 청백리였다.” “대명천지는 밝고 환한 세상이라는 뜻이다.” “친일파들은 모두 창씨개명에 앞장섰다.” “남대문이란 이름은 일제의 잔재다.” “신탁 통치는 소련이 먼저 제의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로 믿고 있는 한국사 상식들이다. 과연 그럴까? 얼마 전 고구려를 소재로 다뤄 큰 인기를 모았던 한 드라마가 심각한 역사 왜곡 때문에 논란을 빚은 적이 있었다. 관련 학자들이 논문을 통해 드라마의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얼마나 ?요한지 보여 준 사례다. 흔히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류가 과거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 역사는 오류와 위조, 불확실한 속설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국사 상식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실제 사실과 다르다. 때로는 기득권의 권력 유지를 위해 때로는 시대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혹은 가설에 풍문이 더해져 잘못된 상식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굳어진 예도 많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사실로 믿고 있는 역사 오류 중 20가지를 엄선해 별도 장으로 구성함으로써 내용의 깊이를 더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사의 진실한 면면을 들여다보며 박제된 지식에 온기가 더해지고 역사의 흐름이 새롭게 재편되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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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호남의 극장문화사
위경혜 | 다할미디어 | 2011-03-1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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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호남의 극장문화사
위경혜 | 다할미디어 | 2011-03-1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1-11-0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3 지원기기:
『호남의 극장문화사』는 극장의 흔적을 쫓아 전라남북도의 도시들을 뙤약볕 아래를 걸어 돌아다닌 저자의 땀의 결실이다. 2006년 4월부터 2007년 1월까지 당시 극장 운영자, 영사기사, 변사, 순업 종사자 등 62명을 일일이 만나 인터뷰하였다. 그 결과 당시 극장의 생성과 소멸 시기, 상영되던 영화 작품, 각종 공연단과 공연 작품, 영화사와 공급사, 영사기사, 순업 전문가, 변사 등 한국 영화사나 공연사에 빠져서는 안될 기록들을 꼼꼼히 수록해 놓고 있다. 대형 음식점이나 나이트클럽, 주차장으로 변해 버린 ‘추억’의 극장들을 그 위치와 흔적을 찾을 수 있도록 약도로 그려 놓는 ‘친절’도 베풀고 있다. 영화를 사랑하고 극장을 사랑하는 한 영화학도의 ‘소박함과 무모함’에 경탄하게 된다.
저자는 호남 지역의 극장 문화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변사의 연행, 영화와 같이 무대에 올랐던 인접한 대중예술, 읍면 단위의 지역을 돌던 순업, 그리고 영화 마케팅의 방법이었던 각종 쇼, 배급사와 흥행사 등을 알아보고, 그리고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각 시군의 극장 순례를 떠난다. 판소리와 굿으로 대표되는 구술문화 전통을 오랫동안 지니고 있는 호남 지역에서 특히 변사가 영화 수용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변사는 영화가 제시하는 서구와 근대라는 낯선 볼거리를 관객에게 소개하면서 근대성의 충격적인 경험을 완화하고, 지역의 토착 문화를 반영하여 영화를 재해석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호남의 관객들은 스크린을 벗어나 관객과 직접 소통하며 감정을 교류하고 공연에 참여하는 현장성이 살아 있는 변사 연행의 영화를 특히 좋아했다. 호남 지역의 영화는 당시 극장 무대에 자주 올랐던 인접 대중예술을 소개한다.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한국 영화 제작 상황은 극히 열악했기 때문에 극장 무대는 할리우드 영화나 연극과 악극, 창극, 여성국극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여성국극단 가운데 호남에서 가장 인기를 누렸던 단체는 함평군 출신의 임춘앵이 이끄는 극단이었다. 악극의 경우, 대표적 인물은 전옥이었다. 1950년대 전옥의 ‘백조악극단’ 공연은 극장가의 흥행 보증수표였다. 연쇄극에서부터 영화배우들의 특정 장면의 실연, 진기한 볼거리의 전시를 의하던 ‘아도로꾸 쇼’와 악극 공연의 막간을 이용하여 노래와 만담을 들려 주는 형식의 ‘바라이디 쇼’도 흥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남 지역의 영화는 인접 예술과의 교섭?갈등?타협하며 수용되고 발전되었음이 밝혀진다. 호남의 읍면 단위 시골 마을 지역민의 영화 관람 욕망을 채워 준 순업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1950년대 호남의 순업 일행은 변사 동행이 필수였는데, 낡은 여사기와 자막 없는 필름, 그리고 영화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시골 마을 관객들 때문이었다. 순업은 대부분 7~8명의 개인이 모여 팀을 꾸려 운영했지만, 상설관을 운영하는 극장 운영자들도 극장 운영과는 별개로 ‘순회영화반’을 두어 순업에 동참하였다. 섬이 많은 호남의 해안 지역에서의 순업은 외딴 지역 사람들의 문화적 욕구를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하였고, 호남 지역 영화 수용의 한 특징이다. ‘호남의 극장문화사’를 다루면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영화배급사와 그들의 활동도 소개된다. 지방에서의 제작 자본 형성으로 서울에서 영화 제작이 이루어졌던 당시 상황은 영화산업 발전에 있어 지방 영화배급사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지역 관객들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던 지방 흥행사들은 제작 자본 제공을 전제로 제작사에게 특정 배우의 출연을 요청하거나 특정 스타일의 영화 제작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어 전라남북도 28개 시군에 소재했던 극장들의 변천사를 다룬다. 극장 설립연도, 극장운영자, 영사기사, 기도, 상영되던 영화, 공연예술 단체 등 추적하면서 당시 영화가 어떻게 수용되고 이해되었는가를 밝혀 낸다. 이 과정에서 흥행에 실패하여 지불할 여관비도 없어 밤중에 도망간 공연단체, 극장주의 영화 검열, 영화 상영 도중의 정전, 지역을 따라 순차적으로 필름이 배급되던 당시 필름이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는 동안의 재미난 이야기 등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소개된다. 그러나 호남 지역 극장의 흥행은 1970년대 흑백 TV가 보급되고 방송 드라마가 인기를 누리면서 위축되기 시작하다가, 컬러 TV가 등장하자 결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한다. 교통의 발달과 관광 상품 등 실외 대중오락의 등장과 맞물려 영화 및 극장 산업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호남 지역의 극장 순례를 마친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1950~1970년대 호남 지역의 극장은 영화 이외의 무대 공연예술이라는 볼거리가 전시되고 구경꾼이 몰리는 공간이었다. 관객은 영화와 공연을 보며 실물을 확인하고 참여하며 공감의 정서를 경험하였다. 또한 도시문화의 대체 경험인 영화 관람이 이루어지는 극장은 근대적 규율을 습득하고 교육과 계몽이 이루어지는 근대 ‘문화’ 공간이었다. 호남의 극장은 영화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문화의 서로 다른 스타일과 형식, 그리고 이것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의 가치와 제도가 충돌, 갈등하고 타협하면서 새로운 이해가 발생하는 공간이었다. 저자는 서울 이외의 지역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영화 수용 문화의 다층적이고 역동적인 성격을 해명하고자 하고 있으며, 한국 영화사 연구의 외연 확대와 창조자로서의 호남 지역민의 정체성 발견과 규명에 기여하길 바라며 이 책을 집필하였다. |